주일/대축일 강론

사순 제2주일(나해)

dudol 0 1,525 02.24 13:09

제1독서 : 창세 22,1-2. 9ㄱ. 10-13. 15-18  

   그 무렵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시자,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주님께서..."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그곳, 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산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 ...아브라함이 손을 뻗쳐 칼을 잡고 자기 아들을 죽이려 하였다. 그때, ..."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마라. 그에게 아무 해도 입히지 마라...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나는 나 자신을 걸고 맹세한다...네가 이 일을 하였으니, 곧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아끼지 않았으니,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너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제2독서 : 로마 8,31ㄴ-34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복음 : 마르 9,2-10
   그 때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그분의 옷은 ...새하얗게 빛났다.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자 베드로가..."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그때에...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일생 중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려보면 그 순간의 아름다운 추억이 힘이 되어 다가오는 삶의 노고들을 쉽게 이겨낼 수 있게 만들곤 한다. 제자들이 만나게 될 수난의 현장에서 세 제자가 목격한 참 예수님의 모습은 그들에게 죽음을 이겨낼 큰 힘으로 작용하여 부활하신 주님을 생명을 걸고 전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세상에 태어난 텔레비젼이 비로소 제 참 모습을 보여준 것은 꽤 오래 전에 방영되었던 이산가족 찾기운동이었을 것이다. 당시 멀리 떨어져 있던 가족들을 화상을 통해 서로 만나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산 가족 서로가 화면에 비추이자마자 시청자들은 그들의 사연을 듣기도 전에 벌써 혈육인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닮은 얼굴, 공통의 가족사, 헤어질 때의 슬픈 사연들을 듣고 보면서 내 눈시울을 붉혔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이후 텔레비젼이 조금 건전하지 못한 내용들을 보여준다 하더라도 텔레비젼의 고마움은 잊을 수가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 참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 쓰나미, 지진, 화산폭발, 대홍수, 눈사태 등등 인류에게 대재앙을 제공하는 것이 지구의 참모습일까? 아니면 그런 큰 재앙을 겪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자정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본 모습일까? 예수님이 어머님의 몸을 빌어 이 땅에 오신 것으로 인해 지구는 크게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하게 된다. 내가 태어나 숨을 쉬고 있고,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고 있고, 맑은 공기, 시원한 물, 푸르른 숲과 바다 등 신비스런 아름다움을 지닌 지구를 찬양하게 된다. 때로 신비에 취해 이따금 겪게 되는 자연의 재앙에 대한 슬픔들을 쉬 잊기도 한다. 
   <물은 답을 알고 있다>라는 책을 보면 물의 참 모습은 육각수에 있다고 하였다. 물을 향해 아름다운 말을 해주면 물의 결정체가 아름다운 육각형을 이룬다고 한다. 물과 더불어 아름다운 말을 해주는 이의 참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그러므로 미루어 생각해 볼 때 예수님의 현성용은 예수님 안에 있는 아름다움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기도 하지만 아울러 아드님을 향해 말씀하시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라고 하시는 성부의 아름다움이 합쳐져 더욱 아름다울 수 있음이라 생각해 보았다.
   하느님의 참 얼굴은 가장 사랑하는 아드님을 십자가에 희생시키실 때라 하고 싶어진다. 그 희생을 통해 인류를 향한 당신 사랑의 행위를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제헌 직전에 아들 이사악을 다시 얻었는데, 성부께서는 그렇게 외아드님을 아끼지 못하셨다. 인류를 위해 당신 외아드님까지 희생하시다니... 이 또한 성부의 사랑의 참모습이었을 것이다.

 

무술년 2월 25일, 이전 강론 자료 정리 

  할머니 등에 업혀 편안히 잠들어 있는 어린 아기의 얼굴을 보면 그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습니다. 해맑은 어린 아기의 얼굴에서 현성용하신 예수님의 얼굴을 상상해 봅니다. 오늘 저는 사람의 얼굴 모습에 대한 묵상을 나누어 보고 싶습니다.

  우선 환자의 얼굴을 떠올려 봅니다. 사람이 건강을 잃으면 안색이 변화되어 가지요? 초췌하고 어두운 모습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그러다가 다시 건강을 회복하면 밝은 안색을 띠게 됩니다. 이 같은 현상을 보면서 사람의 모습은 영육간 건강을 위한 내면의 수양과 건강관리를 하면 누구나 아름답게 변화되어 갈 수 있음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오늘 독서에 등장하는 아브라함과 어린 이사악의 얼굴을 떠올려 봅니다. 100세에 어렵게 얻은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을 하느님께로부터 들었을 때 아브라함의 얼굴 모습은 어떠하였을까요? 칼을 들고 자신을 죽여 희생 제물로 삼고자 하시는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는 아들의 얼굴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아들 이사악은 아버님의 태도에서 야훼 하느님에 대한 신앙의 깊이를 바라볼 수 있었고, 자신을 통하여 후손 대대로 큰 축복이 내리게 되고,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은 후손이 태어날 것이라는 하느님 약속의 말씀에 희망을 갖고 살아가게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구약의 인물 모세의 얼굴을 떠올려 봅니다. 그는 시나이 산에 올라가 40일간 하느님과 함께 지내며 빵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으며 주님과 함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얼굴의 살갗이 빛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였습니다. 그가 십계판을 들고 하산하여 백성들 곁으로 다가왔을 때, 아론과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은 모세에게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하였다(탈출 34,28-29 참조)고 하였습니다.

  모세의 이 같은 이야기를 접할 때면 우리 신앙인들도 빛이신 주님의 성체를 모시고 살아가고 있기에 자연스레 주님을 닮게 될 것이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빛이신 주님의 모습을 이웃에게 보이게 되겠구나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이제 오늘 복음에 언급되고 있는 예수님의 얼굴을 떠올려 봅니다. 그분의 모습은 빛 자체이셨습니다. 세 제자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시고, 그분의 옷은 새하얗게 빛났습니다. 마태오 복음 사가는 예수님의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났다고 하였습니다(마태 17,2).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놀라운 모습을 뵙고 두려움과 황홀감에 휩싸여, 스승님께 무슨 말을 해 드려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는 그 산 위에 초막 셋을 지어 스승님과 모세와 엘리야 세 분이 머물 수 있도록 해드리고 싶은 소망만을 얼떨결에 말씀드릴 수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만나 뵌 빛이신 예수님의 얼굴도 떠올려 보게 됩니다. 주님을 따르던 이들을 박해하기 위해 다마스쿠스로 가던 사울은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자신의 둘레를 환하게 비추는’(사도 9,3) 체험을 하였습니다. 너무 빛이 강렬하여 그는 사흘 동안이나 앞을 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니아스 예언자를 만나 안수 기도와 성령을 받은 후 비로소 다시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는 곧 세례를 받고 주님의 사도가 되어 평생 복음 전파의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후에 자신의 제자요 믿음의 아들인 티모테오에게 보낸 서간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가갈 수 없는 빛 속에 사시는 분”(1티모 6,16)이라 고백하며 주님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 없고 나무랄 데 없이 계명을 잘 지키라고 권고하였습니다.

  오늘 강론을 마무리하며 아브라함의 고뇌의 찬 얼굴을 다시 떠올려 보며, 외아들을 십자가상 죽음 앞에 희생하여 인류를 사랑하고자 하시는 성부의 심정을 묵상해 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 그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요? 세상 사람들은 이 사건의 의미를 알아듣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 성부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게는 나의 외아들을 희생시켜야 할 정도로 사람들이 소중하단다. 세상 사람들 한명 한명을 나는 사랑하고 있다. 나의 이 사랑을 전할 길이 외아들의 희생뿐이라면, 내 아들의 희생으로 사람들이 나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나는 기꺼이 나의 아들을 희생할 것이다. 나는 언제나 너희 사람들 편이다.”

  이 같은 성부의 큰 사랑을 받는 우리는 바오로 사도가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는”(필리 2,15) 이들이 되라는 권고말씀 대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별처럼 빛나는 거울이 되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흠 없게 살아가는 의인들은 마태오 복음사가가 일러준 대로 종말의 날에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입니다(마태 13,43).

 

 

  전통적으로 예수님 변모가 있었던 곳은 타볼산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헤르몬 산이라고 하는 성서학자들도 있습니다. 한님성서연구소 김명숙 소피아 연구원은 해발 588미터인 이 산에 오르면 주변이 다 보이기 때문에 다 볼 산이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가톨릭신문).

 

 

  오늘 복음에는 모세와 엘리야가 변모의 현장에 예수님과 함께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하느님을 직접 만난 구약의 인물들입니다. 그런데 그 만남은 공통적으로 고난과 좌절을 겪는 가운데서 이루어졌습니다. 모세는 절망하여 도망친 광야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엘리야는 박해자들을 피해 도망쳐서 동굴에 숨어 지내다가 하느님을 뵙습니다. 오늘 예수님과 동행한 제자들 역시 스승의 수난 예고에 당황하고 혼란스러운 가운데 예수님의 변모를 체험합니다. 어찌 보면 삶이 고달 퍼서 도망치고 싶고, 좌절하여 동굴에 숨고 싶다면 그 때가 하느님을 만날 때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하느님의 모습이 드러나는 예수님의 변모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이 사건은 우리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처럼 하느님 모습으로 변화하라는 초대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변모는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초막집을 짓고 감동 속에 머물라는 사건이 아닙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그렇게 변화되라는 초대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이런 저런 규정을 잘 지키고 예물을 잘 바쳐서 하느님을 감동시켜 하느님을 변화시키는 종교가 아니라, 말씀에 따라 우리가 변하는 종교입니다. 그리스도교는 본질적으로 변화의 종교로써 미움에서 사랑으로, 복수에서 용서로, 탐욕에서 나눔으로, 죽음에서 영원한 삶으로 변화되기를 추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요?

 

Comments

Category
State
  • 현재 접속자 30 명
  • 오늘 방문자 177 명
  • 어제 방문자 371 명
  • 최대 방문자 761 명
  • 전체 방문자 415,750 명
  • 전체 게시물 3,387 개
  • 전체 댓글수 786 개
  • 전체 회원수 637 명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NaverBand